인공지능 시대와 인문학의 미래
페이지 정보
본문
사진=셔터스톡
[시사주간=오세라비 작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말라버린 우물처럼 인문학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다. 기억컨대 약 10년 전 무렵 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다분히 상업적인 유행으로 말이다. 인문학 붐을 타고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표방한 강좌가 열렸고, 너도나도 인문학에 대해 말했다.
인문학 유행은 대기업 CEO가 모이는 조찬 인문학 강연에서 주목 받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기업체 CEO들은 하나의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대기업 CEO 커리큘럼에 1000만 원 이상 강연료가 지출돼 강단 인문학자들아 초청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한편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도 인문학 강좌를 개설해 인문학자를 초빙하고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소위 ‘스타 인문학자’들 등장했다. 스타 인문학자의 강연에 한 번 쯤은 참석해야 인문학을 향유하는 현대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당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누구누구 스타 인문학 강사의 강연’을 들었다는 인증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문학의 아이돌’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던 한 스타 강사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창 잘나갈 때는 1년간 강연을 하루 평균 5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었던 인문학은 이제 그 단어를 말하는 이들조차 좀체 찾기 어렵다. 유행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뿐이다. 애당초 인문학이 유행처럼 휘몰아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대중들은 스타 인문학 강사들로부터 무엇을 얻었으며, 인문학 강사들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족적을 남겼는가.
인문학은 몇몇 스타강사의 현란한 언변과 제스처, 대중매체들이 띄우는 이미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 강사들이 시류에 맞춰 출판한 책 몇 권을 읽는다 해서 인문주의 정신이 고양되지 않는다. 스타 강사들이 대중에게 입으로 떠먹여주는 인문학에 만족하며, 평소 인문학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문학은 ‘후마니타티스(Humanities)’라는 말에서 생겨났다. 인문학은 전 생애에 걸쳐 인간 정신의 근원을 스스로 통찰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에서 뻗어나가는 철학·문학·예술·사상·역사를 다원적·다층적으로 사유한다. 이런 가운데 종합적으로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진 지성인, 교양인을 지향한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일견 거창하게 들리겠다. 하지만 인문학은 우리 주변에 매우 가까이 있다. 동·서양 고전, 문학작품, 다양한 철학사상, 역사, 예술, 음악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다보면 시야가 트인다. 다양한 학문이 침전물처럼 쌓여 지적 개혁으로 이어진다. 인문학의 전범(典範)을 반드시 고전부터 시작해야하는 법은 없다. 인문학의 뿌리가 고전이긴 해도, 고전만 읽다보면 고전에만 머물 수 있다. 인문학은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데서 출발한다. 필자는 오래 전 사춘기 무렵부터 스스로를 향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정신을 가졌고, 나의 말과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나 스스로를 알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인문학 서적을 읽은 것도 그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것은 단편적인 지식,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는 앎으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뎌졌을 수도 있고, 두뇌의 퇴화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정 속에서 인문학의 위대성과 한계를 동시에 얻기도 하였다. 인문학은 정신의 양식이요, 샘물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혁명 시대에서 인문학의 가치와 미래는 어떻게 될까. 신기술혁명 속에서 성장한 밀레니엄 세대에게 인문주의 정신의 퇴색은 불가피한 측면이 존재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를 접한 닷컴 세대와, 구시대적 지식 토대 속에서 살아온 세대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인공지능(A.I.)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로 발전하는 현실을 조만간 맞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개설해 운영 중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동영상 수익 창출 조건을 다 채웠다. 하지만 정작 광고를 달 수 있게 되자, 업로드한 영상에 90퍼센트 가량이 일명 ‘노란딱지’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노란딱지란 노란색 동그라미에 달러화가 표시된 것을 유튜버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게 붙으면 광고가 차단된다.
여기에 대해 유튜브 측의 설명은 이렇다. “이 동영상은 대부분의 광고주에게 적합하지 않은 콘텐츠로 식별돼 제한되거나 배제된다.” 반면 초록색 달러 표시면 광고에 적합한 영상으로 유튜버는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정치·시사 부문의 민감한 이슈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유튜브 측의 제재를 받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도무지 유튜브의 제재 기준에 의문을 가진다. 광고제한 가이드라인이 한마디로 상당히 넓게, 그리고 은밀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연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상, 범죄 관련 콘텐츠는 규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정치·시사의 핫한 이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다해서 광고 차단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튜브의 이 같은 작업은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1차 바탕으로 인공지능이 먼저 걸러낸다. 그래서 유튜버 사이에는 소위 ‘노란딱지를 피하는 법’을 공유하며 인공지능과 숨바꼭질을 한다. 사실 이런 현실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어느덧 인간이 기계와 싸우는 시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사람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 개발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발전할 터이고, 이미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와 인간이 싸우는 세상이 도래했다.
차원이 다른 기술혁명은 ‘인공지능 사피엔스’로 발전해 기계가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하는 시대를 상상하게 한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고 위협하는 세상이 현실로 다갈 올 수 있다는 공포감도 느낀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어야 할까. 개인의 삶도 변화가 불가피함과 동시에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도 크게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도 있지만, 인공지능이 만드는 환경은 모든 문제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중요성은 여전할 터이고, 인문학에 접근하는 콘텐츠도 시대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때 인문학 지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면 매우 중요한 지적 재산이 되리라 믿는다.
밀레니엄 세대가 고전 인문학을 멀리 한다고 탓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변화했다. 디지털 기술혁명 시대에 맞게 인문학을 새롭게 연결하고 접목시키는 방식이 요구된다. ‘브리콜라주(Bricolage)형 인문학’ 형태는 어떨까. 고전 인문학 이야기를 신기술 브리콜라주 방식으로 재탄생시켜 정신을 살려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 말이다.
시사주간(http://www.sisaweekly.com)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